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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사회

보안사 고문 실상 폭로 “마누라 윤락녀 만들겠다 협박”

by 아나코스 2015. 3. 25.

 <보안사> 저자 김병진씨 인터뷰

“고문수사관보다 판검사에게 더 화난다”

 
2004-12-27 10:45 안성모 (momo@dailyseop.com) 기자 
 
  
“2년간 보안사에서 강제로 근무 아닌 근무를 하면서 고문이라는 고문은 다 겪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울부짖는 피해자들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죠. 곁에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내 자신이 서럽디 서러워 ‘한’이 맺힐 정도였습니다. ‘나도 가해자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게 된 거죠.”

1988년 노태우 정권 시절. 한 재일교포가 쓴 책이 파문을 일으켰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행해진 간첩 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 「보안사」(소나무). 1983년부터 2년간 ‘서빙고 호텔’이라 불리는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강제 노역’한 김병진씨가 밝힌 ‘진실’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하지만 「보안사」는 출간 하루만에 전권이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고 ‘금서’로 묶였다. 당시 군사정권의 치부가 여실없이 드러나자 전국 서점을 일일이 뒤져가면서까지 ‘증거’를 인멸하기에 바빴다. 일본에 머물러있던 김 씨는 여권 발급조차 중지된 채 입국이 금지됐고, 정부의 감시로부터 숨어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00년 DJ정부 시절 제재가 풀려 고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된 김 씨는 이후 조작과 고문에 몸서리치고 있는 고문 피해자들과 함께 진실 규명에 앞장서고 있다.

 

‘마누라 윤락녀로 만들겠다’ 협박…아직도 가슴 서늘

 

성탄절을 하루 앞둔 24일,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 씨는 당시 보안사에서 벌어진 간첩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김 씨 자신이 고문에 의한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였다.

“83년 7월 불법연행을 당해 영문도 모른채 끌려갔는데 4일간 잠을 재우지 않더군요. 엘리베이트실이라는 곳으로 데려가서는 발가벗긴 채 몽둥이 찜질에 전기 고문까지 정말 죽고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당시 김 씨는 고국으로 유학을 온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생 신분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중퇴하기전까지 ‘재일한국학생동맹’이라는 모임에 참가한 것이 ‘간첩’으로 내몰린 화근이 되었다.

“한국에 들어와 본적도 없는 한 선배가 주범이고 제가 종범이라고 그러더군요.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고 협박을 받은 후 어쩔 수 없이 ‘시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견뎌내기 힘들었던 것은 가족들에 대한 협박이었다고 한다.

“고문을 해도 말을 안들으니까 한 수사관이 다가와서는 ‘니 마누라는 윤락녀로 만들고 아이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게 해서 고아원에 보내 버리겠다’고 협박하더군요.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이후 김 씨는 2년간 보안사에서 강제 근무를 하게됐다. 주로 교포들을 취조할 때 통역을 해주는 일이었다. 눈앞에서 고문을 지켜보는 것은 고문을 당하는 것과는 또다른 고통이었다고 한다.

“대공분실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모니터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볼 수가 있습니다. 하루는 한 교포 유학생을 끌고 와서는 몽둥이를 무릎사이에 끼우고 수사관 두 명이서 강제로 무릎을 꿇어 앉히더군요. 피가 튀기고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비명에 뒤섞여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제가 고문을 당하는 것도 지옥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당하는 것을 보는 것 역시 지옥이었죠.”

 

‘고문’ 말만 나오면 돌려보내 또 고문…판결문에 ‘고문’ 없는게 당연

 

보안사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김 씨는 자신이 왜 끌려와 간첩으로 내몰렸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고 한다.

“수사계에서는 늘 ‘근원발굴’이라 부르면서 간첩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교포 유학생 리스트를 만들어놓고는 이름 옆에다가 번호를 적어두고 순번대로 한명씩 불러들이더군요. 결국 저도 ‘순서가 돼서’ 끌려온 거였습니다..”

김 씨는 자신이 근무하던 2년동안 사령부에서 조사한 사람 중 진짜 간첩은 한 명도 없었다고 단언했다. 간첩을 못 잡으니 간첩을 조작했다는 설명이다.

“내부에서 진짜 간첩을 ‘진땡’이라고 불렀는데 최소한 제가 근무하던 2년동안 ‘진땡’은 한 명도 잡지 못했습니다. 전부 ‘시시한 것’ 밖에 없었죠. 진짜 간첩을 못 잡으니까 간첩을 조작해서 만들었던 거죠. 그만큼 수사 수준이 낮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죠.”

김 씨는 얼마전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 등이 ‘이철우 의원 간첩암약’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판결문을 들고나온 것을 보고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판결문에 ‘고문 당했다’는 내용이 없지 않냐는 논리로 ‘조작이 아니다’고 주장하는데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안들었죠. 만약에 검사에게 ‘고문’이라는 말을 한마디라도 꺼내면 당장 보안사로 돌려보내서 다시 고문을 받도록 했습니다. 공식적인 문서에 ‘고문’이라는 단어 자체가 못 들어가게 한거죠. 안기부 책임자였던 정형근 의원이 고문은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김 씨는 판결문을 작성하는 판사 역시 마찬가지로 고문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 후 “고문을 한 수사관들 보다 이들 판·검사에게 더 화가 난다”며 치를 떨었다.

 

‘고문기술’도 일제잔재…‘과거사 규명’ 반드시 이뤄져야

 

김 씨가 15년 전 고발한 보안사의 실상은 현재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당사자들의 경우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도 본명을 그대로 기록했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증거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죠. 보안사에서 나와 일본으로 가족들을 피신시키자마자 곧바로 문구사로 달려가 원고지부터 샀습니다. 숨어서 지내기는 했지만 금방 보안사의 감시망이 좁혀지길래 책이 나오기전에 아사히 신문에도 원고를 보내버렸죠.”

우여곡절을 겪은 후 「보안사」는 일본어판에 이어 한국어판으로 출간됐다. 당시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논란이 되어 야당에서 김 씨를 증인으로 채택하고 싶다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주면 나가겠다고 했죠. 그런데 곧바로 보안사 정보처에서 출석요구서를 보냈더군요. 군사기밀보호위반이라는 거죠. 국회에 증인으로 못나가게 막았던 겁니다. 그 뒤에는 여권 발급도 중지되더군요.”

그래서 김 씨는 이번 17대 국회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고 한다. 특히 국가보안법 폐지와 과거사 진상 규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김 씨가 ‘목숨을 걸고’ 「보안사」를 쓴 이유이기 때문이다. 책을 쓸 당시에는 ‘고발’이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그 목적이 진실을 규명하는 ‘자료’가 된 셈이다.

“과거사 규명과 국보법 폐지는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보법의 족보가 일제 시대 치안유지법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보안사 역시 일제시대의 잔재이며 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안사에서 한 수사관에게 ‘일본에서는 경찰이 조사할 때 손만 올려도 고문으로 간주한다’고 했더니 ‘고문 기술을 일본에서 가져온 건데 그럴 리가 있냐’고 반문하더군요.”

김 씨의 말에 따르면 ‘고문 기술’ 용어에도 일본어가 많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후까시’를 들었다.

“일본말로 하나를 과장해서 열 개인 것처럼 만드는 것을 ‘후까시’라고 합니다. 거기서는 고문을 해서 활동 상황을 뻥튀기하는 것을 ‘후까시’라고 부르더군요. 가령 일본 친구에게 ‘한국에는 자장면이 있는데 얼마하더라’고 말한 것을 놓고 ‘첩보 활동을 통해서 물가 정보를 적국에 알려줬다’는 식이죠.”

 

가해자 조사 없이 어떻게 진실 밝히나…철저하게 조사해야

 

현재 김 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를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자신을 고문했던 기관인 보안사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던 사연을 신청서에 담았다. 또 15년간 고국을 방문조차 하지 못해야 했던 ‘인권유린의 실상’ 도 지적했다.

“무엇보다 명예를 회복해서 고생만 한 가족들에게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에 신청하게 됐습니다. 특히 아들이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김 씨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는 힘겨운 과정이 남아있다. 현행 민주화보상법 체계상 진상규명 등 실체파악에 대한 조사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문에 의한 간첩조작 사건의 경우 가해자에 대한 조사가 없을 경우 사실상 진실을 밝혀내기가 쉽지않다.

“가해자들을 조사하지 않고 어떻게 진상을 규명한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해자들은 조사해야 고문한 사실을 제대로 밝혀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한번 판결이 난 사건을 재조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데 말입니다.”

김 씨는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며 가해자 역시 이제는 양심선언을 해야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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