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수공업 둘러싸고 MB 측근끼리 오간 ‘이권 요구 문서’ 확인
안성모·조해수 기자 | 승인 2013.07.25(목) 18:45|1240호
이명박(MB) 정권이 막을 내리기 직전이던 지난 2월 초, 기자는 여권의 한 유력 인사로부터 한국정수공업과 관련한 정보를 입수했다. 50년 역사를 가진 탄탄한 중견 기업인 한국정수공업은 원자력·화력·열병합 발전소 등에 수처리 설비를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는 기업이다. 연간 매출액도 800억원에 육박하는 알짜배기다. 그런 회사가 권력 실세들로부터 ‘채무 상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채무 내용이 황당했다. 상장을 준비하던 이 회사에 700억원에 이르는 금융 투자를 받도록 해주는 대가로, 10%에 해당하는 70억원을 미국에 설립한 한 페이퍼컴퍼니에 컨설팅 비용조로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비용이 지급되지 않자 이 회사에 돈을 독촉하는 문서까지 팩스로 보냈다는 것.
ⓒ 시사저널 유장훈
회사 이름이 낯설고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렸지만, MB 정권 실세들이 연루된 의혹이라는 점에서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돈을 독촉한 당사자로 지목된 여당의 고위 당직자 출신인 이 아무개씨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MB 정권에서 공기업 감사를 지내기도 한, 여권 내 마당발로 통하는 인사였다. 그는 기자의 전화를 한 차례 받기는 했지만 곧바로 끊어버린 후 더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메시지로 신분을 밝히고 연락을 달라고 했지만 역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취재 방향을 회사 쪽으로 돌렸다. 한국정수공업이 어떤 회사이며 현재 상황이 어떤지 파악에 나섰다.
이 회장의 1억 금품 전달은 ‘빙산의 일각’
그러던 차에 ‘원전 비리’가 터졌다. 김종신 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사장이 금품 수수로 구속까지 됐는데, 돈을 건넨 업체 중 하나가 바로 한국정수공업이었다. 부산지검 동부지청 원전비리수사단은 이 회사의 이 아무개 회장이 1억원대의 금품을 김 전 사장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시사저널>은 검찰·정치권·재계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권 실세들이 원전 사업을 매개로 어떻게 이권 챙기기에 나섰는지를 확인했다. 검찰도 원전 비리 수사 과정에서 한국정수공업 관련 자료를 확보해 수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여당의 고위 당직자 이씨가 한국정수공업측에 팩스로 보냈다는 문서에는 ‘부탁한 한수원과 연결시켜주고, UAE(아랍에미리트연합) 원전에도 참가하도록 해줬다. 또 다른 대주주들이 주식을 매각하려고 할 때 막아줬다. 투자 자금도 끌어왔다. 그런데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과연 한국정수공업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내막을 살피려면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정부는 지역 우수 중소·중견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중소기업 신성장 동력 육성 펀드를 조성했다. 사업은 한국정책금융공사가 담당했는데 자금은 채권을 발행해 조달했다. 일종의 공적 자금인 셈이다. 이 중 산은캐피탈(KDBC)과 사모펀드 투자 전문 업체 JKL파트너스가 2010년 8월께 642억원을 투자해 한국정수공업 지분 68.1%를 인수했다. 이는 한국정책금융공사의 신성장 동력 육성 펀드 1호였다.
시작부터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이 펀드의 결성 금액은 1600억원으로 펀드 자산의 30% 이상을 한 회사에 집어넣은 것이다. 이 돈은 한국정수공업 기존 주주들로부터 주식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사용됐다. 한국정수공업에서 추진하는 사업과 관련해 직접 투자된 것이 아니었다. 국회 정무위 소속인 김기식 민주당 의원실은 “한국정책금융공사의 전체 펀드 투자 운용 내역에 비춰볼 때 예외적인 경우다. 더욱이 기존 경영진과 펀드 투자자 사이에 경영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격화되고 있고, 산은캐피탈 등 펀드측 인물들의 금품 수수 및 면직, 한수원 비리 연루 사실 등 정상적 경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정책금융공사가 투자한 수백억 원이 본래 취지에 맞게 운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지난 6월20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와 고리·월성 원자력본부 사무실 등 9곳을 압수수색했다. ⓒ 연합뉴스
“MB 정권 실세 박씨가 비자금 관리했다”
김기식 의원실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당시 펀드 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오 아무개씨로 알려졌다. 오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같은 포항 출신으로 여당 고위 당직자를 지냈다. 그런 오씨가 이씨를 통해 MB 정권의 핵심 실세 중 한 명인 박 아무개씨에게 한수원 로비와 투자 유치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씨와 박씨는 2007년 대선 당시 MB 캠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등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MB의 친인척까지 힘을 실어줬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문제는 그 대가로 거액의 커미션을 주기로 했는데, 정권 말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권 핵심 인사들이 비리 혐의로 줄줄이 구속되는 상황이 이어지자 다급해진 이씨가 돈 독촉에 나섰고 이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미 십수억 원의 돈이 MB 측근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에 흘러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 프리랜서 언론인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박씨가 비자금을 관리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에 원전 관련 회사인 ㄹ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에 10억원 이상의 돈이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됐다. 이 회사는 현지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정수공업에 투입된 정부 투자 성격의 펀드는 애초 대기업인 ㅎ그룹이 이 회사를 인수할 목적으로 대줬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 지난 6월17일 한국정수공업 이사회가 기습적으로 열렸고, 이때 현 대표이사인 이 회장에 대한 해임안이 통과됐다. 그리고 사모펀드가 회사의 경영권을 접수했다. 이 조치로 현재 한국정수공업 공동대표로 새롭게 선임된 인물은 김 아무개씨다. 김 대표는 과거 ㅎ그룹 자회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 회장의 금품 수수 혐의가 입증돼 회사에서 퇴출될 경우 특정 대기업들이 대거 주식을 사들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ㅎ그룹과 함께 ㄱ, ㄴ그룹 등이 거론되는데 이 중에서 ㅎ그룹이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애초에 계획된 시나리오가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기식 의원은 “국민 세금을 ‘눈먼 돈’으로 여겨 사적 이익을 취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이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이며, 지난 정부의 정책 금융 차원의 펀드 투자 전반을 살펴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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