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작가회의 열어 분단 극복 일조할터”
2004-11-20 16:04 안성모 (anarchos@dailyseoprise.com) 기자
“그는 신랑이 신부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간다고 웃기곤 했다/22개월 옥살이 하고 6개월 설교하고, 15개월 살고 나서 11개월 강연하고/가두는 자가 쓰러질 때까지, 미워하는 자가 미쳐서 정상이 될 때까지/…묘지에 묻히던 순간에도 형 집행정지자였다/그날 밤, 하늘의 별들이 모조리 쏟아져버릴 것 같았다” <김형수의 ‘예언자’ 中>
시인이자 소설가, 또 문학평론가로서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활동가인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 사무총장(46)은 최근 어느때보다 바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어느덧 식구가 1200여명으로 불어난 작가회의가 얼마전 3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가 한창이며 몇해전부터는 남과 북, 우리 민족의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남북작가대회 개최를 위해 금강산을 오가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고 선 국가보안법 철폐의 열망도 어느 시기보다 절실하다. 지난달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전국작가대회’에서 그는 ‘묘지에 묻히던 순간에도 형 집행정지자’였던 고(故) 문익환 목사의 삶과 죽음을 애도하며 창작시 ‘예언자’를 낭독했다. “문 목사님의 삶을 멀리서 동경하며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었다”는 그는 지난 3월 ‘문익환 평전’이라는 한 권의 책을 ‘통일 할아버지’께 올리기도 했다.
“남북분단, 문학 마당을 잃어버렸다”
“마당이 넓든 좁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지만, 마당 한 가운데 선을 그어놓고는 한쪽에서만 놀아야한다고 윽박지르면 어느쪽에서든 마음놓고 뛰놀수 없게 됩니다.”
19일 금요일 저녁, 아현동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만난 김 사무총장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문학의 마당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남북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그래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는 ‘남북작가대회’를 “모국어 문학의 온전한 크기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라고 표현했다.
현재 남북작가대회 개최 논의는 답보상태에 놓였다. 당초 지난 8월 행사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남북간, 북미간 경색국면이 지속되면서 일정이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남북 각각 100명 규모로 평양에서 모이기로 합의한 상태”라며 “올해안으로 꼭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늦어도 내년 봄에는 남북분단으로 끊어졌던 한반도 문학의 이음새가 새롭게 생겨날 것으로 확신했다.
올해 4월,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실무자 회담을 가진 후 북측의 ‘통일문학위원회’ 소속 작가들과 만나면서 남북작가대회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특히 ‘한민족의 작가’라는 동질감이 참석한 남북작가들을 ‘친밀한 사이’로 만들었다고 한다.
“북측도 고전적인 의미에서 작가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더군요. 공식회담은 짧게 선언형식으로 진행한 후 함께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진도’가 나갔습니다. 동행해서 나온 북측사람들도 작가들이 모이니까 너무 재밌다고 할 정도였죠. 분단 장벽을 가장 빨리 넘어서는 특성이 작가들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5.18 항쟁 통해 ‘민족’ 중요성 깨우쳐"
북한 통일문학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장해명 시인과는 첫 만남때부터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6·15선언 1주기를 기념한 남북 각급 대표자 연석회의에 통일위원장 자격으로 갔을 때의 에피소드.
“장해명 시인의 첫 인사가 걸작이었습니다. 저를 보더니 ‘시 좀 쓰게 생겼습네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문학에 대한 진정성 치열함이 서로 느껴지니까 금세 친해지더군요. 같이 갔던 정도상 선생의 작품은 북한에서도 많이 소개가 됐다고 하는데 북측 여성편집자가 열렬한 팬이라면서 들떠서 어쩔 줄 모르더군요. 이 여성편집자가 정 선생을 ‘자유주의 왕초’ 라고 불렀는데 처음에는 무슨 뜻인줄 몰랐다가 나중에 ‘바람둥이’라는 북측 말인줄 알고는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었죠.”
반면 공식적인 회담에서는 합의문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불편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북측에서 ‘반미’ ‘자주’ 라는 용어를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해 정치적 용어를 배제하려는 남측과 맞서기도 했고, ‘노무현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북측을 설득시켜 나가는 시간도 필요했다고 한다. 결국 소수의 작가들이 금강산에서 ‘회담’을 갖자는 북측을 설득해 100명 규모의 ‘대회’를 평양에서 개최하도록 합의에 성공했다.
“사실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회담’은 정치적인 행사가 될 수 있죠. 하지만 다수가 모여 ‘대회’를 열면 이것은 문화행사가 되는 겁니다. 회담과 대회의 차이죠.”
현재 정확한 날짜는 합의되지 않았지만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할 남측 대표 100명은 선정된 상태다. 남북한 작가들간 첫 대규모 행사라는 점에서 ‘범문단’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신경숙 공지영 성석재 등 인기작가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저는 ‘5·18’을 겪으면서 ‘민족’을 발견했습니다. 그때가 20살이 막 지났을 때죠. 사람들마다 4·19, 5·18, 또는 6·15선언을 통해 저마다 ‘민족’을 배우고 깨달았을 겁니다. 저는 이번 우리 대회를 통해서 ‘민족’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국보법 폐지부터 선행돼야 개혁 입법 완수”
대화는 자연스럽게 국가보안법 폐지로 넘어갔다. 국보법 개폐에 대한 국민적 갈등과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서 그는 “속이 많이 상한다”고 했다.
“국보법 개폐 논의를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여론조사’라는 것에 너무 매여있다는 점이죠.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반응을 국민여론으로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들이 국보법의 실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가진 조사였으니까요.”
김 사무총장은 “비가 오고 있다고 해서 해가 동쪽에 떠서 서쪽으로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냐”면서 “먹구름 위에는 엄연히 햇볕이 내려쬐고 있다”고 비유했다. 그는 “국민들이 정확한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국보법이 정치에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여긴다”면서 “국보법 개폐는 정치만이 아닌 경제, 문화, 모든 사회 전방에 걸친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보법 개폐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논하다보면 ‘홍보의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문인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를 ‘작가의 몫’이라고 하는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작은 문제도 전체의 문제가 되면 결국에는 정치의 영역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뽑아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친김에 국보법 폐지 등 4대 개혁입법을 놓고 여야간 맞서있는 정치권에도 ‘현명한 선택’을 요구했다.
“개인적으로 국보법 폐지가 선행되어야 나머지 입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당에서 ‘속도조절’ 이야기가 나왔는데 국보법을 먼저 폐지하고 나머지 법안을 놓고 여야간 합의를 통해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노 대통령 ‘권력 장막’ 거둬내…‘낡은 옷’ 벗긴 후 ‘새 옷’ 장만해야
참여정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기대와 아쉬움이 교차하고 있다. 그는 참여정부의 최대 공으로 “정치권력이 인간의 얼굴을 갖게 됐다”는 점을 들었다. 분단체제를 유지해오던 반생명적 통치언술이 있는데 참여정부가 이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투명성으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예전만해도 대통령이 ‘노하셨다’ 그러면 누구든지 쩔쩔 맬수 밖에 없었죠. 정말 노했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었죠. 하지만 참여정부 들어서는 대통령이 직접 국민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국민으로부터 대통령이 권력의 장막을 거둔 거죠.”
하지만 아쉬움도 남다르다. 가장 큰 부분은 “추상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비록 바로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인류 공동체에 대한 가치를 함께 이어가야 하는데 개혁이 지나치게 실용적인 면만 강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참여정부는 낡은 옷을 벗기는데 가장 능력 있는 ‘용기’를 지닌 정부입니다. 하지만 낡은 옷을 벗고난 후에는 새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죠. 방안에서 어떤 옷이 좋을까 고민만 하기보다는 바깥에 나가 날씨도 보면서 ‘계절에 맞는 큰 옷’을 만들어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변혁 꿈꾸던 젊은 시절…시인 등단 ‘기쁨’ 보다 ‘패배감’ 앞서”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김 사무총장은 올해에는 글쓰기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백일장 등 갖가지 행사에 남북작가대회 등 신경쓸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보니 정작 글쓰기에 할애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틈틈이 문예지와 언론을 통해 ‘의무방어’를 충실히 해내고 있다.
그는 “작가는 예민한 값으로 글을 쓴다”고 말했다. 작가의 예민성이 창조성과 숭고한 가치를 형성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무척 ‘예민하다’.
1985년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그는 ‘기쁨’ 보다는 ‘패배감’이 앞섰다고 한다. 사회 변혁을 꿈꿔온 젊은이로서 시인의 삶보다 현장 운동가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5·18’을 몸으로 체험한 그는 당시 ‘시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당시 80년 5월의 체험이 얼마나 강열했던지 문학의 꿈이 다 깨져 버렸습니다. 81년 군입대 후 군복무 내내 ‘사회 변혁에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현장에 나가서 노동운동에 투신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던 거죠.”
하지만 그는 ‘시인’의 길을 택했다.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죠. 당시 노동운동하던 선배들이 많이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성격이나 체력 뭐든지 현장에 들어가기에는 조건이 너무 좋지 않았으니까요. 문학도로 스타일이 굳어져 있던 겁니다. 제가 서강전문대 1회 입학생이다보니 당시 운동권 인프라도 전혀 없었구요. 결국 김지하 선생과 황석영 선생이 주도한 문화패 ‘일과 노리’에 들낙거리다 서울로 올라와 시문예공모에 보낸 시가 당선되었죠.”
그가 현장 운동가의 꿈을 접고 문인의 길로 접어들기까지 여러 선배들의 조언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중의 삶을 깔보지 말라는 말이 가장 큰 충격이었죠. 삶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깨달지 못한 채 운동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는 거죠. 또 현장에 나가 운동권으로 도장 찍혀서 형사 몇 명씩 달고 다니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거냐는 질책도 많았죠.”
결국 그는 시인이 됐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시, 소설, 평론 등 문학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입을 빌리자면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높다.
일례로 그는 축구 마니아다. 물론 선수보다는 관중으로서 실전보다는 관람을 좋아한다. 인터뷰 말미,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추억으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는 축구를 시에 비유했다.
“시의 힘은 운율에 있는데 축구도 마찬가지로 운율에서 그 힘이 나오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월드컵 4강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이 운율을 절묘하게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자기 운율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졸전을 펼칠 수 밖에 없는데 상대팀이 항상 그런 상태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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