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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사회

‘고문’ 짧아도 ‘영혼의 고난’은 길다

by 아나코스 2015. 3. 26.

가정의학과 전문의로서 ‘고문 피해자 치유모임’ 이끄는 강용주씨  
 


 [978호] 2008년 07월 22일 (화)  안성모 asm@sisapress.com  
 
 
 

                                     ⓒ시사저널 황문성

“고문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당시의 고통을 재경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정신은 ‘20년 전’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고문 피해자 치유모임’을 이끌고 있는 강용주씨(47)는 “국가 권력에 의한 고문은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행위다. 그런 만큼 고문에 의한 피해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고문의 기억이 이후 모든 삶을 지배해버린다. 고문 피해자 대다수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라고 설명했다.

강씨는 고문의 피해자다.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14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99년 2월에야 풀려났다. 수감 중이던 1998년 5월 유엔 인권이사회에 ‘사상 전향제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내용의 개인 통보를 제출했고, 2003년 7월 인권이사회로부터 ‘한국의 사상 전향 제도가 국제 인권 규약의 평등권 등을 침해했다’라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강씨가 혹독한 감옥 생활을 감내하면서까지 전향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고문’에 있었다. 고문 피해자의 경우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도 잘 믿지 못한다고 한다. 고문을 당하면서 ‘영혼이 쓰레기통 속에 처박혀버리는 모멸감’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향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0년, 광주 민주화항쟁에 참여했던 강씨는 “전두환 정권에 두들겨맞고 이용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간첩단 사건으로 감옥에 끌려가기 전 의대 예과에 다녔던 강씨는 감옥에서 나온 후 재입학해 올해 2월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다. 유엔이 선포한 ‘고문 피해자 지원의 날’인 지난 6월26일, 그는 민주화기념사업회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주최한 기념 대회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정신과 전문의들과 함께 ‘고문 피해자 치유모임’을 갖기로 발표하는 뜻 깊은 자리이기도 했다.

한국은 1995년 2월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했지만 의무 사항인 고문 피해자를 위한 치유와 재활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문피해자 재활센터는 세계 각국에서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27곳에 이르며, 독일과 캐나다가 10곳, 덴마크와 네덜란드가 5곳, 남아공화국도 4곳이나 된다.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약을 거론하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해온 한국 정부가 유엔의 인권 협약은 외면해온 셈이다.

강씨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국가 폭력에 의한 고문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데는 소홀했다. 중요한 것은 고문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연대하는 마음에 있다”라고 강조했다. 민가협 주관으로 ‘고문 피해자 치유모임’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7월 초 첫 모임을 가졌다. 그는 치유를 돕겠다고 나서준 정신과 전문의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분들이 밝힌 촛불이 고문의 아픔을 치유해서 더 큰 횃불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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