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이틀 전 <리영희 평전> 출간 등 ‘학문적 계승’ 이어가
언론계, ‘리영희 기자상’ 제정 고민 중
[1104호] 2010.12.13 14:17:35(월) 안성모 기자
“우리가 마냥 슬퍼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선생님이 평생 맞닥뜨렸던 그 야만, 그 허위, 그 불의의 벽이 아직도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 대표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지난 12월5일 타계했다.
기자와 교수로 평생 동안 진실을 추구했던 고인은 10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후 반신 마비로 고생하면서도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병마 앞에 육신은 약해졌지만, 우상에 대한 그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 지난 12월8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영결식장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유족들이 고 리영희 전 교수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 시사저널 윤성호
‘실천하는 지식인’ ‘사상의 은사’ 등으로 불려
지난 12월8일 새벽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2백여 명의 조문객이 몰렸다.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서 이들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나누면서, 고인이 남긴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조문객들은 운구가 빈소를 떠날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다. 고인의 유해는 평소 바람대로 광주시 북구 운정동에 있는 국립 5·18민주묘역에 안장되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이어갈 것이냐’의 문제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추도사를 통해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통절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마음속에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곧은 비석 하나를 세워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박이사는 “민족의 분열을 평화적인 통합으로,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전진하는 민주주의로, 가난한 사람의 고단한 삶을 고르게 잘사는 삶으로 바꾸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용감하게 행동해 아름다운 민주 사회를 더불어 꽃피우겠다고 새겨야 한다”라고 밝혔다.
분단으로 굴곡진 한국 현대사에서 리영희 선생은 ‘시대의 양심’ ‘실천하는 지식인’ ‘사상의 은사’로 불렸다. 고인의 사상적·학문적 성취를 계승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배경이다. 단순히 ‘회고’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기에는 고인이 그토록 열망했던 ‘이성의 시대’가 아직 요원하다는 상황 인식이 깔려 있다. 고인의 첫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우상의 시대를 지나 이성의 시대로 가야 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이 책이 쓰인 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우상이 살아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후대에 한반도 평화 등 ‘리영희론’ 가르쳐야”
아직까지 계승 사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구체화하지는 않았다. 이제 막 장례를 치른 마당에 이를 논의하기는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에 따라 ‘추모사업회’가 결성되면 다양한 계승 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고인의 생애와 사상을 전할 수 있는 출판 사업이 펼쳐질 전망이다. 이미 선생이 타계하기 이틀 전 <리영희 평전>이 81번째 생일에 맞추어 출간되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선생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이다. 그 밖에도 고인과 관련한 저서가 여러 권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과는 별개로 한반도 평화 등에 대한 고인의 사상을 배울 수 있는 강의를 마련하자는 요구도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말처럼 평소 고인은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라고 강조해왔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와 우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리영희론’을 후대에서도 공부할 가치가 있다는 지적이다.
언론계에서는 ‘리영희 기자상’ 제정에 대한 말들이 오가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고인은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후 합동통신에 입사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기자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64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맡았던 1969년 베트남 전쟁과 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로 강제 퇴사를 당했다. 합동통신 외신부장 시절이던 1971년에도 군부 독재와 학원 탄압에 반대하는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강제해직되었다. 이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 고인은,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앞장서 이사와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영원한 베스트셀러’ 된 시대를 움직인 저서들
ⓒ시사저널 윤성호
리영희 선생이 타계한 후 고인의 책을 찾는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고인은 생전에 10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1974년 출간한 <전환시대의 논리>는 당시 만연했던 반공주의의 가면을 벗겨내고, 중국과 베트남 등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고인은 이후 1977년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를 연이어 출간하면서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차례 구속되는 고초를 겪고, 나오는 책마다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대학생들 사이에서 고인의 책은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필독서로 여겨졌다.
한양대 교수로 지내면서 여전히 해직과 복직을 반복해야만 했던 1980년대에도 <분단을 넘어서>(1984),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 <역설의 변증>(1988), 에세이집 <역정>(1988) 등을 집필하며 지식인으로서 식지 않은 열정을 보였다.
1994년 출간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스테디셀러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전환시대의 논리> 후속 작품으로 북한 핵문제, 통일, 한·미 관계, 역사, 언론, 종교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1980년대 후반에도 <스핑크스의 코>(1998), <동굴 속 독백>(1999), <반세기의 신화-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1999) 등 다수의 글을 남겼다.
고인의 마지막 저서는 2005년 출간된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다.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 중이던 상황이라 초벌 원고를 만드는 데에만 2년이 넘게 걸린 역작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근현대사 관련 자료를 연구해 대담을 준비했고, 고인도 질문 하나하나에 대해 일일이 자료를 확인하고 교정까지 보고서 완성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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