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입북 1호 탈북자 남수씨 인터뷰
탈북-입북-또 탈북,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정
“가족 데리러 갔다 왔는데, 사람들이 이해 못해”
[1085호] 2010.08.03 18:32:52(월) 안성모 기사
두만강 부근 함경북도 온성군이 고향인 남수씨(53)의 인생 역정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하다. 그의 표현대로 영화를 만들어도 될 정도이다. 특수부대 장교 출신의 젊은 사업가였던 그는, 1995년 4월 북한을 탈출해 이듬해 1월 한국으로 건너와 식당을 운영하면서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펼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2000년 8월 돌연 북한으로 돌아갔다. 탈북자가 다시 월북을 감행한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탈북 방지 강연 활동을 하면서 유명인이 되었다. 그러던 2003년 6월 남씨는 다시 한번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입국하자마자 국정원으로 끌려간 남씨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시사저널>은 오래전부터 남씨와 알고 지냈던 탈북자들을 통해 그의 행방을 추적했다. 대부분 소문으로 들은 소식을 알려주면서 그가 언론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와 만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그를 지난 7월28일 오전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언론과 가진 첫 인터뷰에서 그는 ‘탈북-재입북-탈북’으로 이어진 드라마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해 자세히 풀어놓았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분단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면과 같았다.
ⓒ시사저널 유장훈
처음에 왜 탈북을 했나?
17세 때부터 군 생활을 했다. 소좌(소령)로 전역했다. 당시에는 북한에서 온성 우산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31세 젊은 나이에 CEO를 맡은 셈이다. 당 비서들은 대체적으로 나이가 젊었지만 회사 경영자는 대부분 50대 중·후반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30대 초반은 처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젊은 나이에 회사를 경영하면서 무서운 것 없이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공장 건물을 신축하면서 자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중에서 시멘트가 제일 걸림돌이어서 직접 시멘트 공장에 가서 한 달 동안 일을 했다. 이 과정에서 돈도 많이 썼다. 개인적으로 쓴 돈은 아니지만, 공장 직원이 우산을 만드는 천을 팔아서 준 돈이 법적으로 걸렸다. 중앙검찰소에서 시멘트 공장에 검열을 나와 온성군 당 책임비서까지 걸리게 될 상황이었다.
이 비서가 ‘6개월만 탄광에 가 있으라’라고 해서 그랬는데 일이 크게 불거졌다. 팔자에 없는 감옥 생활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혼자서 다 뒤집어 쓸 위기였다. 배신감이 컸다. 도와달라고 찾아가니까 연락 자체를 끊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갑자기 북한에서 나오게 되었다.
홍콩을 경유해서 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두만강을 건너 용정에서 차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한국 식당에 들어가서 한국 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돈도 없는 상태에서 고생고생해 영사관에 도착하니까 직원들 대부분이 퇴근하고 없고, 여직원 한 명이 중국 돈 5백원을 주고 돌려보내더라. 그래서 한국 말고 다른 나라로 가자고 결심했다. 베이징을 떠나서 12일 만에 홍콩에 도착했다. 현지 경찰에 잡혀서 한국 영사부 직원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남한으로 가자’라고 했다.
그런데 홍콩까지 오니까 가족을 못 데려온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홍콩에서 일해서 돈을 벌어 여비를 마련하기로 했다. 다음 해 1월에 ‘한국에 안 가겠다’라고 밝혔다.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가족 때문에 못 가겠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안 가면 도로 감옥에 넣겠다’라고 하더라.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 도착해서 조사를 받았나?
도착한 첫날부터 반말이었다. 고문도 당했다. 안 오겠다는 사람을 불러놓고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당시에도 ‘올 이유가 없는데 무슨 임무를 받고 왔느냐’라며 간첩 취급을 했다. ‘도로 보내달라’고 하니까 때리고 야단이었다. 엄청 후회가 되었다. ‘젊은 놈이 어떻게 소령이 되느냐’라고 해서 ‘마음대로 생각하라’라고 했다. 11세에 대학에 가서 17세에 전문부에 다닌 것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최근에 우연히 내 경력을 떼어 보았는데 ‘학력 중퇴’에 ‘군 계급 중사’로 되어 있더라. 한국에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북한에서는 중퇴자가 회사 경영자가 될 수 없다. 학교 교감 생활도 2년 정도 했는데, 대학 졸업자가 아니면 교육계에 들어갈 수도 없다. 법원에 제출해서 내 경력을 다시 만들까 고민도 했다. 훗날 애들이 보면 아버지를 오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정착 생활은 어땠나?
불만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어려운 대출도 받고 식당도 운영했다. 식당이 아주 잘 되지는 않았지만 자리를 잡았다. 당시 식당 운영을 시작한 사람들 대부분은 한 해만에 도산했다. 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늘 가슴이 아팠다. 북한 말로 ‘새끼집’이라고 하는데, 아내와 아들 둘이 있었다. 늘 데려와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입북한 이유가 가족 때문이었나?
아무리 말해도 이해를 못하더라.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넘어갔다는 식으로 여겼다. 언론 보도도 그런 쪽으로 오도를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 나를 두고 ‘오락가락 인생’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더라. 사업이 망해서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식당을 유지하던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당시 한 대학 구내식당 운영을 제안받기도 했다.
그런데 일이 손에 안 잡혔다. 가족부터 데려오고 일을 하자고 생각했다. 두 가지 방안을 생각했다. 하나는 직접 강을 건너서 밤 사이에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탈출 비용을 마련해 7천만원을 가지고 중국으로 갔다. 두만강 중국 쪽에 5천만원을 묻어두었다. 그런데 당시가 장마철이었다. 강물이 넘쳐서 바다 같았다. 서울에서 쌍안경까지 사서 갔는데 애들을 데리고 나오기에는 물이 너무 높았다. 결국 도강을 포기하고 합법적으로 북한에 들어가기로 했다.
▲ “재입북했다 남한에 온 후 간첩으로 오도되어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장애인 보조금을 받으며 지난해부터 농사를 짓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탈북자인데 북한에서 잘 받아주었나?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생각했다. 그 생각이 맞았다. 베이징에 있는 북한 영사관에 가서 ‘서울에서 온 누구다’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믿지를 않더라. ‘예전에 북한에 살던 누구다’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더라. 남한에 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간 1호였다. 정치적으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에서 사람 네 명이 데리러 와서 8월8일 평양에 도착했다. 순안비행장에 내리니까 많은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고 꽃다발도 건네주었다.
첫 일정으로 만수대 김일성 동상에 인사를 시켰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 연극이 아니었다. 김일성을 숭배해서라기보다도 지나온 역경이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는 모두들 위로를 하더라. 고려호텔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정일이 조사를 지시한 게 아니라 잘 대접하라고 했다고 한다.
강연회는 어떻게 갖게 되었나?
당원과 근로자에게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선전 사업을 한 것이다. 노동신문 기자들과 중앙당 선동부 요직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강연 자료를 만들어 주었다. 이 자료를 그대로 읽을 뿐이지 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함경북도 북부 4개 군을 돌았는데 탤런트 인기 이상으로 난리가 났다. 강연장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내용이 남조선 소식이다 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남조선에 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을 보고 나니까 탈북을 막기보다 오히려 탈북을 더 부추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도중에 강연이 중단되었다.
노동당에 가입한 것도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당시 김정일 방침으로 헤어졌던 가족과 재결합을 했다. 탈북을 한 후 자동으로 이혼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노동당에도 새로 입당을 시켰다. 복당이 아니었다. 북한 사람 눈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 번 입당하기도 힘든데 두 번이나 입당을 했으니까 말이다.
다른 직책도 맡았나?
사업이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온성군 당위원회와 보안서에 도와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사돈에 팔촌까지 불러다가 이런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얻는 게 크다고 보니까 엄청 신경을 써주었다. 종합 휴양 시설인 은덕원에서 지배인으로 일했다. 총괄 관리를 하는 자리로, 여기서 말하면 사장 역할이다. 3년 동안 정상 영업을 했다. 일하는 것이 감시가 덜 붙는다고 여겼다. 내가 다시 넘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국가보위부는 늘 나를 감시했다.
남한에 대한 정보와 탈북자들의 근황 등을 북한에 넘겨주었나?
남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안기부에 한 번 가보았고 잡지에서 전경 사진을 봐서 알려주었다. 비밀도 아니다. 대성공사 위치도 알려주었는데 역시 다 알려진 내용이다. 그리고 담당 형사의 이름과 소속 정도였다. 탈북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인물 네 명만 거론했다. 사는 곳의 위치나 연락처 등은 모른다고 했다. 다시 남한으로 돌아갈 생각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될 만한 내용은 피해갔다.
▲ 남수씨의 부인도 지난해 한국으로 내려와 현재 온 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어떻게 다시 북한에서 나올 수 있었나?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경계도 조끔씩 늦추어졌다. 그런데 도당 인사과에서 인민위원회 쪽 일을 해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수락을 했지만 그러면 청진으로 이사를 가야 하고 탈출은 영원히 못하게 된다. 아무래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걸어서라도 가자는 생각에 어머니와 의논을 했다. 아내와 자식들 데리고 떠나겠다고 하자 동생도 데리고 가라고 하더라. 나이가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동생이다. 2003년 6월20일 두만강을 넘었다. 북한 쪽에는 공사 자재를 가지러 중국에 간다고 출장 신청을 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북한 돈 5만원을 미리 준비했다. 알려진 얼굴이라서 별로 의심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베이징까지, 밤에는 길을 걷고 낮에는 산에서 자면서 만리길을 걸었다. 어린 애들이 힘들었다. 아내는 도중에 잡혀서 북한으로 도로 끌려갔다. 당시에는 죽은 줄 알았다. 재작년에야 5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지만 살아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그래서 지난해에 데려 왔다. 정말 고생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영화를 만들어도 될 정도로 엄청나게 고생했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어떤 조사를 받았나?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국정원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자꾸 몰아세웠다. ‘자식들 데리러 갔다’라고 솔직하게 말해도 ‘일부러 간 것 아니냐’ ‘무슨 임무를 받았고 또 어떤 과업을 수행해 갔느냐’라고 심문했다. 예전에 안기부 때도 이들과 어긋나서 이로울 게 없었다. 그래서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나와 가족을 책임져달라’라고 했다.
2년을 교도소에서 지냈는데 어땠나?
실형이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큰일 났다 싶고 또 괘씸하더라. 북한과 다를 바 없다는 실망감이 컸다. 당시 판사에게 한마디 했다. ‘재판장님은 자식 있으십니까’라고 물으니까 ‘있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재판장님이 제 입장이라면 평생 자식을 버리고 가슴에 묻겠습니까, 아니면 나처럼 데려 오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판사는 말을 안 하고 나가버렸다.
감옥에 가면 아들 둘은 누가 돌봐주나 걱정이었다. 큰 애가 열세 살이고 막내가 열한 살이었다. 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기도 했는데, 이미 판결이 나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소지가 없다고 했다. 인권도 허울뿐이구나 싶었다. 강연회는 하고 싶어서 했겠나. 나에게 죄를 묻는 사람들도 북한에 가면 다 하게 되지 안 하고는 못 배길 것이다.
출소 후에는 어떻게 지냈나?
직장에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원서를 수도 없이 냈다. 간첩으로 오도되어 가는 곳마다 거절당했다. 심장 수술을 해서 큰일을 못한다. 장애 3급이다. 밥 벌어먹고 애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데 취직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국가가 한 가정을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다.
장애인 보조금이 조금 나온다. 지난해부터 농사를 짓고 있다. 탈북 후 처음 사귄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철원 쪽에 땅을 샀다. 여기서 벼농사와 하우스 농사를 하고 있다.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고 몸도 불편해서 힘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
재입북하는 탈북자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데.
내가 갔다 온 후 뒤따라 간 사람들이 많다.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었다. 사실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자리를 줘야 한다. 예전처럼 의무 고용을 하도록 해야 한다. 탈북자를 직원으로 받는 회사에 세제 혜택 등을 주면 된다. 남한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데도 안 한다. 공기업이 얼마나 많나.
탈북자들이 재입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 적응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다시 넘어가겠나. 진수성찬도 마음이 나쁘면 못 먹는다. 옥수수밥이라도 마음이 좋으면 맛있게 먹는다. 정부가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안 주었다. 재입북자가 생기는 것 자체가 정부의 책임이다. 정책 실패를 뜻한다. 남한 사회에 제대로 정착을 못해서 넘어간 경우도 그렇고, 설령 간첩 활동을 한 경우라도 정부가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한 것 아닌가.
그동안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많이 갔다. 탈북자 정책이 실패했다고 보면 된다.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북한에서 어렵게 살아서 이 정도도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살다 보면 주위 시선이 따갑다.
사실 탈북자라는 말도 귀에 거슬린다. 그냥 실향민이다. 우리도 전쟁 당시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과 다를 바 없다. 다시 넘어간 사람에게만 책임을 묻는데, 어렵게 자유를 찾아왔다가 3류 취급당하고 동정받으며 살아가는 탈북자들의 아픔을 이해해주어야 한다.
얼마 전 ‘황장엽 암살단’이 적발되었다.
(정찰총국에는) 최고의 엘리트들이 들어간다. 절대 허술하게 안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북한이 황장엽을 죽여서 얻을 게 뭐가 있을까. 오히려 잃을 게 더 많다고 본다. 그리고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렇게 어정쩡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탈북자 중에도 간첩이 없다고 말은 못한다.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좋은 침투 조건을 북한에서 활용 안 하겠나. 탈북자들이 활동하는 데 조금도 저해가 없다. 보안과 형사들이 있어도 한 형사가 몇십 명을 어떻게 관리하나. 예전에는 경찰이 운전기사이기도 하고 개인 비서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앞으로의 계획은?
농사에 뜻을 품었으니까 귀농해서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노후 보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다행히 친구를 잘 만났다. 남한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 때문에 세상이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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