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기축옥사(己丑獄事)나 다름없다.”
검찰 수사에 대한 법원의 불만·반감 고조돼
안성모·조해수·박성의 기자 승인 2019.01.21 11:00 호수 1527
“최근 사법부에 대한 검찰 발언, 선 넘고 있어…검찰 개혁은 왜 않나?”
“현대판 기축옥사(己丑獄事)나 다름없다.”
한 부장판사가 기자에게 법원 분위기를 전하면서 한 말이다. 기축옥사란 1589년(선조 22년) 서인이 정여립의 역모를 빌미로 동인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10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동인은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전라도는 반역향(反逆鄕)이라는 오명을 썼고 인재 등용에서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당시 역모의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은 모두 희생됐다.
이 부장판사는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관련된 판결을 내린 판사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며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잡힐 만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문제가 있는 판사와 그렇지 않은 판사를 가르면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펄펄 끓는 법원
법원이 펄펄 끓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시작된 ‘적폐청산’이 도를 넘어섰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법원 전체가 이른바 ‘사법농단’의 주범으로 내몰리는 데 대한 반감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법원 내에서는 특히 ‘적폐 수사’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검찰의 행태에 이를 갈고 있는 중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도 “살벌하다”는 말로 요즘 법원 분위기를 표현했다. 이런 분위기가 일반 사건에 대한 엄격한 판결, 나아가 정치인 관련 사건에 대한 냉혹한 판결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직 대법관들에 이어 사법부 수장이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은 1월11일, 법원 내 분위기는 온종일 어수선했다. “창피하면서도 무지 화가 났다” “국민의 사법부 불신이 정점을 찍었다” “사법부 전체가 모욕당하는 느낌이다”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를 지켜봐왔다는 한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을 둘러싼 사법농단이 불거지면서 법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건 사실이다. 개혁과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분명 있다”면서도 “무분별한 비난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불만은 현직뿐 아니라 전직 판사들 사이에서도 팽배하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법원은 사법기관이고 검찰은 준사법기관인데, 최근 들어 검찰이 법원의 판결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 성명을 발표하는 게 일상화되고 있다”며 “특히 이른바 ‘적폐’로 지목된 사건에 대해서는 비판의 수위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이나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하는 판사에 대해 마치 적폐의 한 패거리인 양 몰고 있다”며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경우에도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토끼몰이를 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 적폐 수사와 관련해 영장을 기각한 판사들은 신상털이를 당하는 등 여론몰이의 대상이 됐다.
법원 반격 나섰나
불만과 반감이 고조되면서 그동안 참아왔던 법원이 ‘역습’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감 중이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1월2일 자정 소리 소문 없이 석방되자 이런저런 해석이 나돌았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주역으로 거론돼 온 우 전 수석은 지난해 2월 국정농단 관련자들을 제대로 감찰하지 못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와 별건으로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공직자 등을 불법 사찰한 혐의로 구속돼 지난해 12월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이 추가됐다.
검찰은 불법사찰 사건의 1심 선고가 나기 전인 지난해 7월 우 전 수석의 구속기한이 만료되자 국정농단 묵인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에 우 전 수석을 구속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울고법 형사2부(차문호 부장판사)는 당시 검찰 측 요청을 받아들여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항소심이 발부한 영장의 구속기간 만료일이 다가오자 다시 구속영장을 발부해 달라는 검찰의 요청을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검찰 측은 “형량을 모두 합하면 실형 4년인데 구속연장을 안 해 주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유감을 표했지만 법원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에 대한 불법 정보조회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의 경우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성창호)는 1월4일 “남 전 원장이 서천호 전 국정원 2차장에게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첩보를 검증하도록 명시적으로 승인했다고 보기 어렵고, 묵시적으로 승인했다고 하기도 분명치 않다”며 무죄 선고를 내렸다. 채 전 총장이 현 검찰 내에서 갖는 위상을 놓고 봤을 때 검찰로서는 뼈아픈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검찰은 1월9일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앞서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승소한 것을 두고도 다시 뒷말이 나돈다. 노씨는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특별사면을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 반발해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고 소송을 냈다. 창원지법 민사1단독(허성희 부장판사)은 지난해 8월23일 선고공판을 열고 “국가가 노건평씨에게 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이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노씨가 문제 삼은 ‘성완종 리스트’ 수사를 맡은 특별수사팀의 팀장이 문무일 현 검찰총장이라는 점에서 미묘한 파장을 몰고 왔다.
법원 성격상 드러내놓고 공세를 취하기는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검찰의 칼날을 무디게 할 수는 있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법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로펌의 대표변호사는 “법조계에서 사법부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란 게 있고 권위란 게 있다. 또 분야를 막론하고 프로토콜(규칙과 약속)이란 게 있지 않나. 그런데 최근 사법부에 대한 검찰의 발언 등을 보면 선을 많이 넘지 않았나 싶다”며 “단순 조직논리로만 보더라도 사법부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불편한 것을 넘어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연히 검찰수사에 현미경 잣대를 들이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검찰 개혁은 누가 하나
‘현 검찰이 적폐 수사를 할 자격이 있느냐’는 문제 제기도 법원 내에서 나오고 있다. 한 부장판사는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촛불혁명의 시민들이 바라는 개혁 대상 1호는 검찰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검찰 개혁은 쏙 들어가고, 그 대체물로 법원이 도마에 올라왔다”며 “법원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검찰이 자신이 살기 위해 법원에 대한 수사를 언론과 국민에게 무분별하게 공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법원의 개혁은 물론 중요하지만 법원의 문제 때문에 검찰의 문제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며 “사법기관에 대한 대규모 수사를 검찰이 진행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검찰에 대한 수사는 누가 할 것인가. 검찰 개혁은 누가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 개혁을 목 놓아 얘기했는데 결국 검찰이라는 칼을 쥐어보니 이만큼 잘 드는 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수사권 조정을 놓고 검찰과 대립하고 있는 경찰 측 인식도 이와 비슷하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강력히 주장해 온 황운하 대전경찰청장은 지난해 10월 페이스북을 통해 “참여정부 시절 검찰 개혁 실패의 원인 중에는 골든타임을 놓친 까닭에 검찰의 노골적인 반발을 진압할 힘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다”며 “일사천리로 진행될 듯하던 검찰 개혁의 앞날이 암울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일부 검찰 출신 인사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최근까지 검찰에서 일했던 한 변호사는 “검찰은 나의 친정이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강조한 후 “3권 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에 대한 수사를 검찰이 진행하고 있는데, 검찰 역시 수사 또는 적폐청산의 대상인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그렇다면 검찰에 대한 수사는 누가 할 것인지, 검찰을 바로잡을 수 있는 세력은 누구인지 이제는 살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특수통’으로 검찰에서 최고 요직을 맡았던 한 인사는 “사법농단 수사로 법치주의가 흔들릴까 가장 걱정이 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기조에 찬성하지만 정확한 팩트 확인 없이 의혹과 의심만으로 사법부의 뿌리를 흔들 정도로 수사를 확대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며 “검찰이 정치권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켜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검찰의 정치 중립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일선에서 근무하는 검찰의 생각은 달랐다. 한 검찰 관계자는 “촛불혁명을 통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검찰의 위상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는 성역 없는 수사를 말한다”며 “법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오히려 법원을 수사하면서 검찰이 공공성과 공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도 “법원의 적폐는 도를 넘어섰다. 지금까지 국회든 언론이든 사법부를 견제하지 못했다”며 “이번 기회에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통해 법원의 적폐를 발본색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은 행정부에 속한 준사법기관이 맞다. 하지만 사법농단 사건을 두고 ‘행정부가 사법부를 수사하는 일이 맞느냐’는 식의 질문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며 “이 같은 질문은 사법부가 마치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집단이라 여기는 것으로 매우 오만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검찰은 공정히 수사하고 법원은 공정한 판결을 내리면 된다”며 “그 이상의 해석을 자꾸 하려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법원 내부의 불만은 기득권을 상실할 수 있다고 보는 일부 법관들을 중심으로 반발하는 성격도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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