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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사회

‘법조 패밀리’ 막강 파워

by 아나코스 2016. 8. 22.

판·검사들 눈치 보기 바빴다

 

안성모 기자 ㅣ asm@sisapress.com | 승인 2014.04.02(수) 09:21:37


‘황제 노역’이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벌금 254억원을 내지 않는 대신 받게 된 노역의 일당이 5억원에 이르는 데 대한 비난 여론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 검찰이 노역 집행을 정지하고 벌금에 대한 강제 집행에 나섰지만 파문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특히 허 전 회장의 집안이 ‘법조 패밀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특권층 봐주기’ 관행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일반 국민이 벌금 대신 노역을 할 경우 보통 일당 5만원을 쳐준다. 벌금 254억원이면 50만8000일, 연수로 따져 1392년을 일해야 한다. 49일만 노역하면 됐던 허 전 회장과 차이가 커도 너무 크다. 물론 평소 수입이 얼마냐에 따라 액수가 달리 책정될 수 있다. 그 판단은 최종적으로 법원의 몫이다. 하지만 법 집행이 공정하려면 죗값 역시 공평하게 매겨져야 한다.

 

첫 단추를 꿸 때부터 논란이 예고됐다. 광주지법은 2007년 11월20일 조세 포탈과 횡령 혐의를 받고 있던 허 전 회장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사전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점과 함께 ‘관련 기업 및 직원들이 많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했다는 것인데, 대기업 회장 재판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다. 

 

검찰도 맞장구를 쳤다. 사전구속영장까지 청구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던 광주지검은 2008년 9월25일 결심 공판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했다. 허 전 회장에 대해 징역 5년과 벌금 1016억원을 구형하면서 벌금형의 선고유예를 요청한 것이다. 탈루한 세금을 뒤늦게나마 모두 납부했고, 횡령금 100억원도 변제 공탁했다는 게 이유였다. 여기에 기업의 부담이 크다는 점이 더해졌다. 광주지검은 또 원심에 대해 항소를 포기했다.

 

당시 법조계 내에서도 검찰의 행태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가 많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광주·전남 지부는 성명을 통해 “서민들에게는 100만원대 벌금의 선고유예 판결이 내려져도 즉시 항소했던 검찰의 처사와 명백히 배치된다”고 꼬집었다.

 

‘향판’ 부친의 9남매 중 장남

 

논란은 그해 10월14일 실시된 국회 법사위의 광주고검·광주지검 국정감사로 이어졌다. 눈길을 끈 것은 여당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소속 율사 출신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는 점이다. 보통 국감에서 검찰을 몰아세우는 쪽은 야당이다. 이날만은 공수가 뒤바뀐 모습이었다. 이는 허 전 회장이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호남 출신으로 기업 역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허 전 회장은 1942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허진명씨는 광주·전남 지역에서 37년간 판사로 일했다. 광주지법 순천지원장을 거쳐 1979년 목포지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한 지역에서만 근무한 전형적인 ‘향판(鄕判)’이었다.

 

허 전 회장은 누구보다도 향판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8년 2월 1심 재판을 앞두고 광주지법원장을 지낸 두 명의 거물급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했다. 2002년 퇴임한 전도영 변호사와 2006년 퇴임한 박행용 변호사였다. 두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허 전 회장에게 노역 일당 5억원을 판결한 장병우 당시 광주고법 부장판사의 상관으로 있었다. 장 판사도 현재 이들 뒤를 이어 광주지법원장을 맡고 있다.

 

현직 부장판사의 9남매 중 장남이던 허 전 회장은 일찌감치 공직자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그는 200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도 잘 못하고 공부도 시원치 않아 중학교 때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광주공업고와 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후 4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업에 뛰어들었다.

 

법조가의 명맥은 혼인을 통해 이어갔다. 허 전 회장의 매제가 광주지검 차장검사를 지냈고, 사위는 현재 광주지법 판사로 재직 중이다. 허 전 회장의 남동생은 2000년대 초·중반 법조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전·현직 판사들의 골프 모임인 ‘법구회’의 스폰서였다고 한다. 사실상 총무 역할을 맡아 모임을 관리했던 그는 법조계는 물론 정계 인사와도 친분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취업 사기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구속됐다가 항소심이 시작되면서 보석으로 풀려났다. 

 

30개 계열사 그룹 총수에서 횡령범으로 추락

 

여동생 허부경씨는 지난해 법무부 산하 교정중앙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전국 57개 교도소에서 활동하는 교정중앙협의회는 6000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여성이 회장을 맡기는 허씨가 처음이라고 한다. 28년간 재소자들에게 교화 활동을 펼쳐온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법무부장관상, 2010년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허 전 회장이 지역 경제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81년 대주건설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이 시기 주택건설업 호황세를 타고 회사가 급성장했다.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아파트 건설 공사에 참여해 광주·여수·순천 등 호남은 물론 서울·하남·온양 등 전국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91년 전국 1군 건설업체로 진입한 대주건설은 1994년 당시 연간 매출액 1359억원에 도급 순위 52위였다. 대주주택·대주콘도·동양상호신용금고·두림제철산업 등 계열사도 늘어났다.

 

1994년에는 9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광주 지역 민영방송권을 따내 광주방송(KBC)을 설립했다. 이 무렵 허 전 회장은 서울 진출을 노렸다. 1995년 2월 대주건설 본사를 서울로 옮겨 수도권 지역에 주력하고, 광주·전남 지역은 계열사인 대주주택에 맡겼다. 하지만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맞았고 자금 확보를 위해 광주방송과 대주건설을 매각해야 했다.

 

이 시기 허 전 회장은 계열사인 동양상호신용금고가 568억원을 불법 대출한 사실이 적발돼 출국금지 조치를 당했다. 동양상호신용금고는 허 전 회장이 전액 출자한 지역 금융기관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초 한신증권을 주간사로 추진한 기업공개를 철회하기도 했다. 당시 기업공개 계획을 자진 철회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허 전 회장은 서울 진출에 재도전한다. 2001년 11월 계열사인 대한시멘트가 56년 전통의 대한화재를 인수했다. 당시 허 전 회장은 2005년까지 대주그룹을 종합금융그룹으로 육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03년 말에는 경영난을 겪고 있던 광주일보를 매입해 회장 및 발행인을 맡았다. 2005년에는 베트남 진출에 나서기도 했다.

 

대주그룹은 계열사 30여 개에 매출액 1조2000억원이 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시공 능력 1위 업체인 대우건설 인수에 나서 화제를 뿌리는가 하면, 동아건설 인수에서는 차점에 머물러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쌍용건설에도 눈독을 들이는 등 사업 확장에 열을 올렸다. 계열사인 대한조선에는 수천억 원대 신규 투자에 나섰다. 전남 해남 등 두 곳에 대규모 조선소 건설을 진행했다. 이를 성장 엔진으로 삼아 30대 그룹에 진입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 허 전 회장이 500억원대 법인세 포탈과 100억원대 회사 돈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여기에다 글로벌 금융 위기에 따른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대주건설은 2009년 1월 정부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출 판정을 받았다. 이듬해인 2010년 12월 대주건설이 부도 처리됐고, 다른 계열사들도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대주그룹은 사실상 해체됐다. 허 전 회장 자신은 2011년 12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허 전 회장이 한국을 떠난 지 이미 1년이 다될 무렵이었다.  

 

‘5억 노역’ 판사에 비난 쇄도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노역 일당 5억원’이 논란을 부르면서 이 같은 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대한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1심부터 논란이 됐다. 광주지법 형사2부(이재강 부장판사)는 2008년 12월30일 허 전 회장에 대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원을 선고했다. 벌금을 내지 않을 경우 1일 노역 대가로 2억5000만원을 책정해 203일만 노역을 하면 벌금을 모두 탕감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항소심은 이보다 더 관대했다. 광주고법 제1형사부(장병우 부장판사)는 2010년 1월21일 허 전 회장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을 선고했다. 노역 대가는 일당 5억원으로 책정했다. 벌금은 절반으로 줄이고 노역 대가는 두 배로 늘린 것이다. 이에 따라 노역 기간은 4분의 1가량으로 줄어 허 전 회장은 49일 노역으로 벌금을 모두 탕감받을 수 있게 됐다.

 

비난의 화살은 항소심 재판 당시 부장판사였던 장병우 현 광주지법원장으로 향하고 있다. 광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반복적 불공정 판결을 낳은 현 광주지법원장의 조속한 입장 표명과 함께 사법부의 재벌 봐주기식 편향된 판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사법연수원 14기인 장 법원장은 광주·전남 지역에서만 29년을 근무한 전형적인 향판이다. 허 전 회장의 부친과 변호인들도 향판 출신이다. 장 법원장은 장병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동생이기도 하다.

 

논란이 확산되자 전국 수석부장판사들은 3월28일 대법원에 모여 개선책 논의 작업에 착수했다. 대법원은 향후 유치장 노역 제도에 대한 손질과 함께 향판 제도에 대한 보완 대책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황제 노역’ 논란이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계기로 작용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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