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검증에 휘말리며 당내에서 비난 폭발
“이대로 가면 민주당 망해”
[974호] 2008년 06월 24일 (화) 안성모 asm@sisapress.com
▲ 통합민주당 손학규, 박상천 대표와 당 지도부들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가축 전염병 예방법 홍보 유인물 배포 및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의 정치 역정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하다. 운동권 출신 학자에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 순간부터 ‘정체성 검증’을 받아야 했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 입당한 그는 당 대변인, 보건복지부장관,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대권 주자로서 역량을 키웠지만 보수 진영의 대표 선수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량주’로서의 가치만 평가받았을 뿐 ‘비주류’ 꼬리표를 떼는 데는 실패했다. 이른바 정통 보수 세력에게 손대표는 ‘왼쪽’으로 성향이 치우친 다른 동네 정치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한나라당 후보가 아닌 민주·개혁 진영 후보로 지지율 1위에 오르는 이상 현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대통합을 추진 중이던 당시 여권으로부터 ‘러브콜’이 이어졌고, 심사숙고 끝에 손대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던 민주신당은 그의 합류가 지리멸렬한 대선 정국에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손대표도 이해가 맞아떨어져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정체성 검증’은 이쪽에서도 매한가지였다.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성향이 치우쳤다는 지적을 받으며 검증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는 정동영 후보에게 밀려 대권 도전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선 참패 후 통합된 민주당을 이끌어온 손학규 대표의 정체성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민주당이 야당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중심에 손대표가 놓여 있다. 당내 재야파 모임인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연)가 지난 6월10일 국회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손학규 대표 체제’에 대한 공세적 발언이 쏟아졌다.
최규성 의원 “지금처럼 부끄러운 시절은 없었다”
장영달 전 의원은 “민주당이 아직도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국민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최규성 의원은 “지금처럼 부끄러움이 많은 시절은 없었다. 그래도 열린우리당 때는 자랑할 확실한 어젠다가 있었다”라고 토로했다. 이목희 전 의원은 손대표가 제시한 ‘제3의 길’과 ‘새로운 진보’라는 당의 진로에 대해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현재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남북 관계에 대한 정책을 빼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라고 따져 물으며 “정체성을 잃어버린 당이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손대표를 겨냥한 이같은 비판은 이미 당내에 잠재되어 있었다. 대선 참패 이후 공멸 위기에 놓이자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 언제든지 다시 불거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최근 정국의 태풍이 된 촛불 집회가 이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민주당은 촛불 집회 참가 여부 등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초 배후론을 의식해 당이 주관하는 별도의 장외 투쟁을 계획했지만 세 차례밖에 열지 못했다. 그나마도 몇 십명의 의원과 몇 백명의 당원만이 참여하는 ‘그들만의 행사’에 그쳤다. 이후 개별 의원들이 촛불 집회에 참가해왔지만 시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그동안 민주당은 뭘 하고 있었느냐”라는 핀잔만 들려왔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일고 있는데도 민주당에 대한 국민 여론은 여전히 싸늘하다. 이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급락했지만 제1 야당인 민주당이 반사이익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6·4 재·보선 결과를 놓고도 ‘한나라당의 참패’가 거론되지만 ‘민주당의 승리’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분위기다. ‘국민 대 정부’의 대결 구도에서 민주당이 끼어들 틈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우원식 전 의원은 선거 결과에 대해 “국민이 한나라당을 이긴 것이지 민주당이 한나라당을 이긴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촛불 집회에 대한 당 지도부의 대응과 관련해서도 “정파의 이익을 위해 광장이 아닌 구석에서 고차 방정식을 계산하고 있었다”라고 꼬집었다.
문학진 의원은 비판의 날을 더욱 곧추세웠다. 문의원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반사이익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민주당이다. 국민으로부터 정체성을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문의원은 “이대로 가면 민주당은 망한다. 당은 설 땅을 완전히 잃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우려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뿐 아니라 주요 현안에 대한 손대표의 입장에도 반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한·미 FTA 문제가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한·미 FTA를 처리 못해 유감이다” “FTA 비준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 등 손대표의 지난 발언을 놓고 ‘민주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다’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손대표의 리더십에도 불신 팽배
정체성 논란은 리더십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여러 정파가 물리적으로 결합한 민주당은 당내 다양한 의견을 한 곳으로 응집시키는 한편, 80석 규모의 야당이 과반을 넘긴 여당을 상대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된다. 손대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계파 정치’ ‘밀실 정치’ 등 부정적 용어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손대표를 비롯한 현 지도부에 대한 당내 불만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전당대회를 연기해야 한다는 요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은 오는 7월6일 치러질 전대를 통해 당 대표와 최고위원 등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할 예정이다. 당 안팎에서는 손대표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 정세균 후보가 이미 대세론을 형성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6명의 전·현직 의원은 6월12일 성명서를 통해 “온 국민이 촛불 집회로 밤을 지새울 때 우리 당 내부에서는 계파별 지분 다툼, 자기 사람 심기 등 부끄러운 일이 자행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7·6 전대는 우리들만의 잔치로 끝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하며 전대 연기를 요구했다. 이들은 “쇠고기 정국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전대를 한시적으로 연기하고 당내에 비상 체제를 구성해 현 정국에 일사불란하게 대응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전대 연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정세균 대세론’에 맞선 연합 전선이 형성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종의 ‘반 손학규 연대’인 셈이다. 각 정파별로 입장 차이가 있어 쉽게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지만 상황 변화에 따라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는 지적이다.
문학진 의원은 ‘정세균 대세론’에 대해 “섣부른 판단이다”라고 반박했다. 문의원은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수 있다. 후보 구도에 변화가 올 수도 있고, 필요하면 연대를 할 수도 있다. 표 바꿔먹기가 아니라 노선 중심으로 연대가 가능하다”라고 밝혔다.
옛 민주당 출신인 한 인사는 “후보 등록이 시작되면 당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불붙을 것이다. 또, 손학규 대표를 비롯한 현 지도부에 대한 평가 작업도 이뤄질 것이다. 당을 새롭게 확립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치러야 할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위기에 처한 당을 위해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독배’를 받아들었던 손학규 대표가 대선 후보 경선에 이어 두 번째로 맞게 된 정체성 검증과 리더십 평가의 격랑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손대표는 6·10 촛불 집회에 다녀온 다음 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많은 분들로부터 제1 야당으로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라며 ‘강한 야당’을 역설했다.
'희망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뷰] 박지원 “예비회담 판문점 제안, 북한측이 반대해 무산” (0) | 2015.03.26 |
---|---|
봉하마을에 문서 보관소 차렸다고? (0) | 2015.03.26 |
‘가판’ 흑자 낸 진보 정당 ‘광장 정치’ (0) | 2015.03.26 |
이주영 “개헌 논의에서 대통령 빠지는 게 좋아” (0) | 2015.03.26 |
국회 ‘밀린 숙제’ 잘 끝낼 수 있을까 (0) | 2015.03.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