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한·미 FTA 비준 강공에서 협상으로 유턴…민주당도 뾰족수 없어 ‘끙끙’
[996호] 2008년 11월 19일 (수) 안성모 asm@sisapress.com
▲ 국회 외교통상위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한·미 FTA 보완 대책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정치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여러모로 골칫거리이다. 갈팡질팡, 오락가락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FTA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진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선 비준’을 밀어붙이려던 정부·여당은 더 이상 ‘원칙’만을 고집하기 어렵게 되었고, ‘선 대책, 후 비준’을 주장해온 민주당도 딱 부러진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예산안 및 각종 법안을 처리해야 하는 국내 정치 일정이 맞물리면서 더욱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야 간 극한 대립은 일단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한 발짝 물러섰다. 당초 야당이 합의하지 않으면 단독 상정을 통해서라도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최근 여야 합의 처리 방침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11월13일 당·청 조찬 회동에서 “야당이 추가 대책을 마련해오면 당·정 협의를 거쳐 종합적인 FTA 피해 보전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11월17∼23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FTA 방미단을 파견해 상황을 점검하고, 정부와 야당에서 마련할 대책안을 비교·검토한 이후에 비준 동의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표면적으로 야당의 ‘선 대책’ 주문을 수용한 모양새이다. 물론 ‘연내 처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홍원내대표는 “관련 대책이 법안·예산안에 반영되어 즉시 시행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춘 뒤 연내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겠다”라고 밝혔다.
미국이 재협상 요구할 경우 후유증 만만치 않아
한나라당이 ‘단독 처리 불사’라는 강경책에서 이처럼 방침을 다소 유연하게 바꾼 것은 당 안팎의 여러 사안을 고려한 결과로 여겨진다. 우선 정권 교체를 앞두고 있는 미국의 정치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부터 파악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조기 비준’을 통해 미국을 압박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웠지만, 비준 이후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할 경우 치러야 할 후유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오바마 당선인측이 자동차 부문 등에서 재협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는데, 여당 책임론이 불거질 것이 뻔한 상황을 일부러 맞이할 필요가 없다. 주호영 원내수석부대표는 이와 관련해 “야당과의 합의 없이 한·미 FTA를 강행 처리하는 것과 야당과 합의 처리하는 것은 미국에서 볼 때도 분명히 다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단독 처리를 강행할 경우 떠안게 될 정치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예산안은 물론 각종 감세 법안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MB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 과반 의석만을 믿고 힘 대결로 나설 경우 여야 관계는 급속히 냉각될 수밖에 없다. 한·미 FTA 문제로 야당과 전면전을 치르다가 자칫 다른 핵심 법안들이 발목 잡혀 곤욕을 치를 수 있다. 홍원내대표는 11월12일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는 법안과 예산이 산적해 있는데 한·미 FTA를 강행 처리한다면 정말로 이번 정기국회가 어려워진다”라고 밝혔다.
▲ 야당 의원들이 한·미 FTA 졸속 비준 반대 비상시국회의 발족식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으로는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나라당은 한·미 FTA와 관련해 일찌감치 ‘조기 비준’을 당론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미국 대선 이후 당내에는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이는 수도권 규제 완화, 감세 법안 등 정부의 핵심 정책에 대한 이견 표출로 옮아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당내 중진들까지 청와대와 내각의 전면적인 국정 쇄신을 요구하는 등 당·청 관계 자체가 삐걱대고 있다.
‘MB 노믹스’의 입법화는 사실상 여당인 한나라당이 열쇠를 쥐고 있다. 거여 정당으로서 내부 결속력을 어떻게 다지느냐에 따라 정기국회 성적표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만큼 상대적으로 공감대가 넓은 한·미 FTA 문제를 통해 내부 전열을 재정비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 지도부와의 오찬에서 “어려운 시기일수록 당에서 여러 의견이 나오면 엇박자로 비칠 수 있으니 당에서 한목소리를 내달라”라고 주문한 것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여권의 ‘명분 쌓기’ 성격도 엿보인다. 한·미 FTA와 관련해 야당에 보완 대책을 주문함으로써 그에 따른 책임도 공식화하려는 전략적 판단이다. 이후 한·미 FTA 비준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을 야당에 돌릴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두는 셈이다. 민주당 등 야당이 “여당으로서 직분을 포기한 것이다”라며 강력하게 반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정식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한나라당이 무리하게 졸속 비준을 서두르다 여의치 않자 야당에 화풀이하듯이 선 대책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의 대책 요구에 발끈했지만 민주당도 한·미 FTA 문제에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선 대책’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지만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물론 정부와 여야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사안이지만, 상대가 입장을 달리하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해왔다는 지적이다.
‘선 대책, 후 비준이냐 재협상이냐’를 놓고도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초 ‘선 대책, 후 비준’ 원칙을 당의 입장으로 공식화했지만,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협상을 준비해야 한다”라고 밝힌 후 ‘재협상론’이 새롭게 힘을 얻는 분위기이다. 협정 체결 이후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발생하는 등 상황이 바뀐 만큼 관련 협상 내용도 새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노 전 대통령 ‘재협상’ 발언에 내부 반응 엇갈려
민주정책연구원장인 김효석 의원은 11월13일 당 고위정책회의에서 “지금은 비준 시기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재협상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여건의 변화가 생긴 가운데서 재협상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책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재협상 준비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같은 날 국회에서 발족한 ‘한·미 FTA 졸속 비준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비상시국회’에도 23명의 민주당 의원이 참여했다. 모임은 ‘재협상을 포함한 새로운 전략 마련’을 요구 안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 내에는 노 전 대통령의 ‘재협상’ 주장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선 비준’과 마찬가지로 ‘재협상’을 먼저 거론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과 함께, 한·미 FTA 타결 당사자이며 협상을 주도한 전임 대통령으로서 적절치 못한 발언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여당에게 ‘무책임’ ‘말 바꾸기’ ‘이율배반’ 등 공격의 빌미만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정국의 중심에 서는 것 자체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다. 민주당이 한·미 FTA 문제를 놓고 정부·여당과 대립각을 세워 제1 야당으로서 힘을 키워나가야 하는데, 노 전 대통령이 나서면 당의 입지가 그만큼 좁아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당내에 ‘친노 대 반노’ 대립이 다시 불붙으면 가뜩이나 낮은 지지율로 고전 중인 민주당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지적이다. 분열된 소수 야당이 거대 여당과의 협상에서 힘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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