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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사회

개야도에 불었던 ‘빨갱이’ 광풍 “너무 억울해 가슴에 피가 맺힌다”

by 아나코스 2015. 3. 25.

‘빨갱이’ 광풍에 속수무책 “너무 억울해 가슴에 피가 맺혔다” 
조업 도중 납북, 돌아오자 ‘간첩’ 누명…진실 규명은 진행형  

 
 [969호] 2008년 05월 09일 (금)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시사저널 황문성

 

전 북 옥구면 개야도. 군산항에서 뱃길로 40여 분 걸리는 섬으로 빼어난 자연 경관과 넉넉한 시골 인심을 자랑한다. 높은 봉우리 없이 구릉으로만 이어져 있는 섬 지형이 마치 이끼가 피어나는 듯이 보여 개야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9백여 명 남짓한 마을 주민 대다수가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온 전형적인 어촌이다.

하지만 1970~1980년대 개야도에 몰아닥친 ‘간첩 색출’ 광풍은 평온하던 마을을 삽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조업 도중 북한에 피랍되었다 돌아온 납북 어부들은 십수년이 지나 느닷없이 간첩으로 내몰렸고, 혹독한 고문과 협박에 의해 가족과도 같았던 이웃을 간첩으로 허위 증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경비정이 들어오는 날에는 쥐죽은 듯 조용히 숨죽여 지내야 했던 개야도 주민들. 서슬 퍼렇던 군사 정권이 이들에게 덧씌운 멍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정권이 두 차례나 교체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온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참말로 힘들게 살았제.” 환갑을 넘긴 사내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졌다. 고향 개야도를 떠나 군산에 살고 있는 서창덕씨(62)는 간첩으로 낙인찍혀 살아온 지난 세월을 떠올리자 분통함과 억울함에 목이 멘 듯했다.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론가 끌려가 군홧발에 차이고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피를 토하며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된 구타와 협박. 결국 보지 않은 것도 보았다고, 하지 않은 일도 했다고 거짓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1984년 5월 낯선 사람들에 이끌려 검정색 승용차를 탄 순간 평범했던 한 어부의 삶은 절망의 나락으로 내던져졌다.

“물어볼 게 있다며 데려가더니 다짜고짜 간첩 짓 한 거 다 아니까 불라고 했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일자무식이 무얼 알아야 불든 말든 하지. 한 달 넘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죽을 고문을 다 받으니까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겠더라. 결국 시키는 대로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체포 사유도 알리지 않은 채 그를 불법 감금한 것은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소속 전주 보안대였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던 전주 보안대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전주 분실이 수사한 것처럼 꾸몄다. 안기부 수사관 명의를 도용해 서류를 작성한 후 국가보안법 및 형법을 적용했다.

검찰과 법원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군산지청은 북한 지도원에게 간첩 행위를 지도받았고 군사 시설과 국가 기밀을 탐지했다는 보안대 조서대로 기소했다. 군산지법도 공판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채 징역 10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이후 항소와 상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서씨는 한창 일할 나이에 7년을 광주교도소에 갇혀 지냈다. 그중 2년 남짓은 병동에서 보낼 정도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열네 살부터 고깃배를 타고 바닷길에 올랐던 뱃사람의 건장함은 더 이상 되찾을 수 없었다. 고문 후유증은 출소 후에도 제대로 된 사회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문에 의한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적 박탈감이었다. 이웃은 물론 형제도 누이도 등을 돌렸다. 면회 한 번 오지 않은 동기들이 야속했지만 그들도 시달릴 대로 시달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막 이루었던 가정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당시 서씨는 태어난 지 백일도 채 안 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실형 살고 나오니 보안감찰 대상이라며 경찰이 들락거려     

 

서창덕씨 ⓒ시사저널 황문성

 

“아내가 교도소로 면회 와서는 헤어져달라고 하더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 얼굴도 못 보고 지낸다. 딱 한 번 아들이 찾아온 적 있는데 ‘간첩 아버지 둔 적 없다’라고 냉정하게 말하고는 돌아서더라. 그 뒤로는 연락이 없다.”


아들 이야기에 꾹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출소 이후에도 죽으려고 몇 번을 시도했다고 한다. 서씨는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되더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4년을 함께 해 준 두 번째 부인 덕이 컸다. ‘간첩하고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믿고 감싸안았다. 그녀는 “형제간에도 본체만체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어떡하든지 살아보자, 그러다보면 풀리지 않겠느냐, 절대 딴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서 서로 의지하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우선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쳤다. 영세민으로 지정되었지만 한 달에 받는 돈은 14만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부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남루한 집도 그나마 어렵게 빌렸다. 생계를 위해 두 사람은 고물을 주워서 내다 팔고 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생활을 힘들게 했다. 간첩으로 실형을 살다 나온 서씨는 보안감찰 대상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경찰이 찾아오니까 이웃들이 이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의심의 눈초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졌다. 그래서 물어볼 것이 있으면 전화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경찰에 통사정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이제 감시받는 신세는 벗어났다. 그는 가슴을 치며 “경찰이 안 오니까 여기가 확 뚫리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지난해 말 서씨에 대한 간첩 사건이 ‘조작되었다’라고 발표했다. 조사 결과 ‘전주 보안대가 간첩으로 허위 조작해 처벌한 사건으로 확인되었다’는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서창덕씨가 뒤늦게나마 오명을 벗을 기회를 갖게 된 데는 ‘고향 형님’인 정삼근씨(65)의 도움이 컸다. 정씨 역시 간첩 혐의로 고통을 겪은 피해자다. 두 사람이 간첩으로 내몰리기까지 과정은 1년의 시간 차만 있을 뿐 빼다박은 듯 닮았다. 1985년 5월 처제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군산 처가를 찾았다가 전주 보안대에 끌려간 정씨는 두 달 동안 이어진 혹독한 고문에 어쩔 수 없이 허위 조서를 썼다. 이로 인해 그는 7년형을 선고받아 6년을 전주교도소에서 보냈다.

“동생 친구인 창덕이가 간첩이라고 TV 뉴스에 나왔을 때 ‘저 놈이 미쳤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해에 내가 똑같이 당했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 고문했다. 이가 다 부러지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빨리 써야 집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런 일이 두 달 동안 반복되었다.”


정씨는 “하지 않은 일을 왜 했다고 그러느냐”라며 조서 작성을 완강하게 거부하기도 했다. 하루는 못 보던 사람이 들어와 녹음기를 틀어놓고 조서 내용을 확인한 적이 있었는데, ‘밤에 가족 몰래 북한 방송을 들었다’는 대목에서 “사실이 아니다. 수사관이 시켜서 썼다”라고 하자 “이 새끼 아직 멀었다”라고 욕설을 내뱉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몇 시간 후 그는 실신할 정도로 구타를 당했다.

대법원까지 간 재판 과정에서도 ‘허위로 조작되었다’라고 호소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당했던 한 판사가 ‘무죄인데 그냥 내보내면 내가 옷을 벗어야 한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재판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사전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기자 회견장에 불려갔을 때도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은 어느 매체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정삼근씨 ⓒ시사저널 황문성

 

명예는 회복했지만 가족들의 고통은 말로 다 못해

 

교도소 안에서도 정씨는 ‘허위 조작극’을 주장하며 끝까지 맞섰고, 형제·친지들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을 통해 진상 규명과 석방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이 국민의 정부 시절에 사면 복권을 받아내고 지난해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작 사건’으로 진실 규명을 내리는 밑거름이 되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긴 세월 동안 힘겨운 싸움을 펼친 끝에 명예를 회복해가고 있지만, 국가 권력이 옭아맨 ‘간첩 조작 사건’으로 인해 정씨는 많은 것을 잃었다. 특히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한이 되어 쌓여 있다. 경제적 어려움에 부인은 늘 허드렛일을 해야 했고, 아들·딸들은 ‘간첩 자식’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자라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다. ‘간첩 자식’이라고 같이 놀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큰딸은 당시 보안대 수사관들이 집안을 들쑤셔 놓은 충격으로 정신이상을 일으켜 나이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시집조차 못갔다. 그게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다.”

개야도 주민들에 대한 오해는 이제 풀렸다고 한다. 출소 후 증언을 했던 사람들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따졌다는 정씨는 “그 사람들도 결국 피해자다. 당시 보안대에 끌려가 ‘본인은 했다고 하는데 너는 왜 아니라고 하느냐’며 무지하게 당했다. 지금은 서먹한 것도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개야도 납북 어부 중 아직까지도 진상 규명을 받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몇 년 사이 비슷한 시기에 간첩 혐의로 끌려간 섬 주민이 10여 명은 된다는 것이다. 정씨는 “보안대원들이 경비정을 타고 와서 누구를 잡아가면 마을 주민들은 ‘또 누구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가족·친구 등 아는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길부씨와 정영철씨는 형을 살고 나온 후 돌아가셨는데 가족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이 분들에 대한 진실 규명도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또 개야도뿐 아니라 다른 섬에서도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후 간첩으로 끌려간 사람이 많았다. 지나간 삶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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